자료실

성경자료 |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 제4장 서신서 - 해석학적인 문제

페이지 정보

작성자 서규태 작성일2006-12-21

본문

제4장 서신서-해석학적인 문제.

해석학적 문제는 과연 이 본문들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더 어렵다. 석의적인 문제는 비록 어떤 특정한 점들에 대해 의견들이 일치되지 않는 면이 있지만, 최소한 본문의 의미를 결정짓는 요인들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대다수가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그러나 해석학의 경우,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결정 요인들이 존재하는 것 같지가 않다. 모든 사람이 다 해석학을 시행하고 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제기되는 주요 논제는 문화적 상대성의 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어떤 것이 문화적인 문제여서 1세기 사람들에게만 해당되고, 어떤 것이 문화를 초월하는 문제여서 시대를 넘어 서서 온 인류에게 해당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상당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통상적인 해석학.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언제나 해석학에 연루되어 있다.
즉 좀 개화된 우리의 상식을 본문에 접목시켜서 그것을 할 수 있는 대로 우리의 상황에 적용시킨다. 그리고 적용할 수 없을 듯이 보이는 것은 그저 A.D.1세기에 해당되는 말씀으로 간주해 버린다.
예를 들어, 딤후4:13에서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고 명령하고 있지만, 실제로 우리들 중에서 성령의 부르심을 받아서 그 명령을 지키기 위하여 드로아까지 가야 한다고 느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환난에 처할 때에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라는 똑같은 서신에 있는 말씀(딤후2:3)을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본문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과연 그 본문을 그대로 지켜야 하느냐 아니면 말아야 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생각나게 하여 서로서로를 일깨우느냐'(벧후1:13) 하는 것이 더욱 문제가 된다.
즉 난제는 위의 두 본문들의 중간에 해당되는 그런 유의 본문들이다. 이런 본문에 대해서는 일관성이 없고, 따라서 특정한 본문들만을 선호하거나, 혹은 '회피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관성있는 해석학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지침들이 필요한가?

기본 법칙.
어떤 본문은 그 본문의 저자나 그의 첫독자들에게 의미하지 않는 바를 의미하지 않는다라는 원칙을 우리는 이미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석의가 우선이 된다. 이 법칙은 본문이 의미할 수 없는 바를 규정하는 한계를 설정하는 데에는 반드시 도움을 준다.

예) 고전13:10절(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온전한 것이 신약 성경이라는 형태로 이미 왔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하던 것(예언과 방언)은 교회에서 그 기능이 이미 정지된 것이라는 해석.
그러나 이 해석은 본문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그런 의미로 그 말씀을 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바울의 첫 독자들은 신약성경이라는 것이 생겨날 것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바울로 하여금 그 독자들이 전혀 깨달을 수 없는 그런 내용을 쓰도록 허락하셨을 리는 더더욱 없다.

두 번째 법칙.
우리의 처지(즉 삶의 정황)가 1세기의 정황과 유사할 때에는 언제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1세기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모두 지금까지 불변하는 진리이다.

확대 적용의 문제.
오늘날의 교회에 유사한 정황이나 비슷한 사정이 있을 경우, 본문의 적용을 오늘날의 다른 사정에로 확대하는 것이 합당한가? 아니면 본문을 1세기의 정황과 전혀 다른 오늘날의 사정에 곧바로 적용시키는 것이 합당한가?
여기에는 명백한 석의가 따라야 한다.
  (정리 곤란)
  

유사성이 없는 특수 상황의 문제.
20세기에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1세기만의 문제를 다루는 본문과, 또한 어쩌면 20세기에도 일어날 수 있으나, 그럴 가능성이 희박한 그런 문제를 다루는 본문이 그것이다.
그런 본문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여기에서 적절한 해석학은 다음과 같은 두 단계를 거쳐야 한다.
첫째, 특별히 조심스럽게 석의를 함으로써 그들(A.D.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과연 무엇이었는가를 들어야만 한다. 그렇게 하면 대개 확실한 하나의 원리가 도출되는데, 그 원리는 역사적 특수성을 초월하게 될 것이다.
둘째, 그 원리는 아직 어떠한 상황에라도 아무렇게나 내키는 대로 마구 적용할 수 있을 만큼 무시간적인 것이 되지는 못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반드시 참으로 유사한 상황에 적용해야만 한다.

예1) 바울은 '거치는 것'의 원리를 근거로 우상 축제에 참예하여 먹고 마시는 것을 금한다. 그러나 여기의 '거치는 것'이 단순히 다른 신자들을 실족케 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거치는 것'의 원리란 한 신자가 자신이 선한 양심을 가지고 능히 행할 수 있다고 느끼는 그 무엇에 대해서 자신의 행동으로나 말로 하는 부추김으로, 선한 양심으로 그런 일을 도무지 행할 수 없는 다른 신자로 하여금 그 일을 하게 만드는 그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 원리는 참으로 유사한 상황에만 적용시킬 수 있다.
예2) 바울은 우상의 축제에 참예하여 먹고 마시는 일을 절대적으로 금하고 있다. 그것은 곧 귀신에 참예하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형태의 심령술, 사술, 점성술 등을 금하게 하는 하나의 규범적인 금령인 것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사도가 없지만,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전9:14)는 원리가 오늘날의 교역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원리가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확실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제는 이처럼 무시해 버릴 문제와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문제를 어떻게 서로 구별하느냐 하는 것이다.
곧 문화에 따라서 변하고, 기독교 집단들에 따라서 달라지는 그런 것을 어떻게 찾아내야 하는가? 과연 무시해 버릴 문제는 어떤 것들인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지침을 제시할 수 있다.
① 서신서에서 확실하게 무시할 문제로 말하고 있는 것은 오늘날에도 똑같이 취급해야 한다. 곧 먹      는 것, 마시는 것, 날을 지키는 것 등이 이에 속한다.
② 무시할 문제는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것이다 - 종교적인 문화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      도. 그러므로 문화에 따라서 변하는 경향이 있는 문제들은 보통 무시할 문제로 여길 수 있다.
③ 서신서에 기록된 죄의 목록들에는 위에 열거한 내용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무시      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제시한 사항에 대해 모든 사람이 다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유로운 사람은 자신의 자유를 과시해서는 안되며, 그런 문제에 대해 개인적으로 확신을 갖고서 행하는 사람 역시 그 문제로 남을 비방해서는 안된다.

문화적인 상대성의 문제.
① 서신서들은 특별한 사정을 배경으로 한 A.D. 1세기의 문서로서 1세기 교회의 특정한 상황에 대해      말하는 것이므로, 1세기의 언어와 문화에 의해서 제한을 받는다.
② 서신서에 나타나는 많은 특정한 상황들은 1세기의 정황에 철저하게 제한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      것들이 개별적으로 현대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적용되는 일이 거의 또는 전혀 없음을 모두      가 인정하고 있다.
③ 그 밖의 본문들 역시 1세기의 정황에 철저하게 제한을 받으나, 그들에게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새로운 그러나 유사한 정황에로 옮아갈 수도 있다.
④ 그러므로 또 다른 본문들 역시 1세기의 정황에 의해 제한을 받으면서 새로운 정황에로 옮아가거      나 그냥 그대로 1세기의 정황 속에 남아있거나 하는 일은 가능하다.

문화들은 사실상 서로 다른 것이다. 비단 1세기와 20세기의 문화만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20세기 문화 자체 안에서도 상당히 다른 양상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문화적 상대성을 배경하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 그 점을 인정하는 것이 정당한 해석학적 과정이며,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서신서의 성격을 보아서도 불가피한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동시에 해석학이 정당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인정할 만한 지침 이내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문화적으로 상대적인 사항과 그 본래의 정황을 초월하여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규범이 되는 사항을 구별하는 지침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자 한다.

1) 먼저 성경의 중심이 되는 핵심적인 메시지와 그것에 종속되거나 그 주변에 해당되는 것을 구별해야 한다. 따라서 인류의 타락성, 그리스도의 죽음이나 부활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활동인 구속,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한 그 구속 사역의 완성 등은 분명히 핵심에 속하는 내용이다.

2) 신약성경 자체가 본래적으로 도덕적인 것으로 보이는 사항과 그렇지 않은 사항을 구별하여야 한다. 본래적으로 도덕적인 사항들은 절대적이며, 모든 문화에 다 해당된다.
그러나 본래적으로 도덕적이지 않은 사항들은 문화적인 표현에 속하며, 문화에 따라서 변화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죄에 대한 바울의 목록에는 결코 문화적인 사항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발 씻는 문제, 거룩한 입맞춤을 나누는 것, 시장터의 우상 제물을 먹는 일, 여자가 기도나 예언할 때에 머리에 쓰는 일, 바울이 개인적으로 독신을 선호한 사실, 또 여자가 교회에서 가르치는 일 등은 본래적으로 도덕적인 문제는 아니다. 이 문제들은 다만 그 특정한 정황 가운데서 행하거나 악용되어서(불순종이나, 사랑의 결핍에 오는 것을 경우) 도덕적인 문제로 등장하게 된 것 뿐이다.

3) 신약 성경 자체가 시종 일관성 있는 증거를 하는 사항과 좀 다르게 증거하는 사항을 특별히 주목해야 한다. 신약성경이 통일된 증거를 보여주는 문제들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인의 윤리적인 처신으로서의 사랑, 보복하지 않는 개인 윤리, 싸움, 증오, 모든 종류의 성적 부도덕 등의 그릇됨.
반면, 다음과 같은 사항에 대해서는 신약성경은 일관성 있는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교회에서의 여자의 사역(롬16:1-2, 롬16:7, 롬16:3, 고전14;34-35, 딤전2:12). 로마에 대한 정치적인 평가,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문제 등.

4) 신약성경 내에서 원리와 특정적인 적용 내용을 서로 분간하는 문제도 매우 중요하다. 신약성경 기자에게는 어떤 절대적인 원리로써 어떤 상대적인 적용 내용을 뒷받침하며, 그러면서도 그 적용 내용을 절대화시키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5) 할 수 있는 대로, 성경 기자들이 선택한 문화적 상황을 신중하게 파악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단 하나밖에는 선택할 여지가 없는 그런 문화적 상황에 대해 신약성경 기자가 동의하는 정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런 입장이 문화적으로 상대적인 것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예를 들면, 동성애에 대해 신약성경은 반대라는 하나의 입장만을 취한다.
노예 제도나 여자의 지위나 역할에 대해서 고대의 저작자들 어느 누구도 노예제도를 악한 것으로 보거나, 여자가 근본적으로 남자보다 열등하다고 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신약성경 기자들 역시 노예제도를 악한 것으로 비난하지 않았다. 신약성경 기자들은 자기들이 당시의 주도적인 문화적 태도를 반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 주위 세계의 유일한 문화적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

6) 1세기와 20세기 사이에 문화적인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에도 유의해야 한다.
20세기 교회에서의 여자의 역할에 대해서 결정하자면, 1세기에는 여자들이 교육받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바울이 롬13:1-7에서 논하는 국가도 오늘날의 민주주의 국가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악법이 고쳐지고, 악한 관리가 축출당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 것이다.

7) 마지막으로, 이 점에서 그리스도인다운 관용을 실천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차이점들을 인정하고 서로서로 의사를 소통하여야 하며, 어떤 원리를 규정하려는 노력으로부터 시작하고, 마지막에 가서는 견해를 달리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그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당면 과제 중심의 신학의 문제.
당시의 정황을 근거로 하고 있는 서신서의 성격 때문에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유의 사항들을 제시하자.
1) 서신서가 당시의 정황을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에 때로는 우리의 신학적인 이해에 몇 가지 제약이 생기더라도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 경우도 있다.
예)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두 형제가 재판을 받기 위하여 이방인의 법정에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를 설명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장차 세상과 천사를 판단하게 되리라고 말씀한다(고전6:2-3). 본문에는 이 이상의 설명이 없다.
그래서 그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그 일이 어떻게 실행될지 전혀 모른다.

고전10:16-17절. 거기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 자신의 주의 만찬에 참예하였음을 근거로, 그들이 우상의 집에서 음식 먹는 일에 참예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변론한다.
그렇다면 '참예'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로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우리들 모두는 알고 싶어 하지만, 우리들의 지식은 그 진술이 당시의 정황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결함이 있을 수밖에 없다. 본문 그 자체가 드러내는 바를 넘어서는 해석이 확실한 석의를 근거한 해석과 동등한 성경적 또는 해석학적 가치를 지닐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성경 속에 주셨지만, 반드시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주신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따름이다.

2) 서신서의 본문들은 정황을 근거로 한 것이어서 오로지 당시의 사람들의 문제에만 답변해 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들에게 특수한 문제를 그 본문들에서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난관에 봉착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때로 그 본문이 답변해 줄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우리들의 문제(예 : 낙태, 재혼, 유아 세례 등)는 그 당시에는 제기된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곧 창조의 타락, 구속, 그리고 마지막 완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포함한 전체적인 성경적 신학을 근거로 하는 것뿐이다.
즉 일종의 성경적인 세계관을 그 문제에 적용시켜 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