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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자료 |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 제6장 사도행전 - 역사적 선례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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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규태 작성일2006-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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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사도행전 - 역사적 선례의 문제.

구약의 설화들을 읽을 때 우리는 도덕적인 교훈을 얻거나 풍유화시키거나 또는 본문 이면에 숨겨진 뜻을 알려고 하는 등등의 경향이 있다.
또 구약의 설화들이 우리들 자신의 삶을 위한 하나의 성경적인 선례가 된다는 생각은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도행전을 읽을 때에는 거의 대개의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하나의 성경적 선례로 받아들이는 것을 보게 된다.
즉 행전은 단순히 초대교회의 역사를 말씀하는 것 뿐 아니라, 모든 시대의 교회들에 대하여 규범적인 모델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본다.
바로 이 점이 행전이 안고 있는 해석학적 난점이다.
대개의 복음주의자들은 행전의 교회를 회복해야 할 표준으로, 이상으로 가르친다.

사실 교회 안에서 수많은 분파가 생기게 된 것도 행전이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해석학적인 정확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방언을 동반한 성령 세례, 재판을 팔아 모든 물건을 공유하는 행위, 등이 행전을 근거로 하여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온 것이다.

사도행전의 석의.
사도행전은 읽기에는 좋은 책이지만, 그룹 성경 공부를 하기에는 힘든 책이다. 이유는 사람들이 사도행전을 대하고 공부를 하게 되는 이유가 저마다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에 대한 특별한 저마다의 관심사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그 책을 읽고 공부할 때에 그 내용들을 상당히 취사선택하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독자들이 사도행전을 주의 깊게 읽고 공부하도록 도와주고, 누가의 관심사를 통해서 그 책을 보도록 도와주며, 또한 여러분이 읽어가면서 갖게 될 몇 가지 새로운 문제들을 제기하고자 한다.

역사로서의 사도행전.
헬라의 역사는 단순히 기록을 보존하거나 혹은 과거의 연대를 기록해 두기 위해서만 기록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역사는 사기를 진작시키고 즐기려는(즉, 좋은 독서감이 되게 하려는) 목적을 위해서, 또한 사실을 알리고 교훈을 주고, 때로는 변증을 하기 위해서도 기록되었다.
누가의 두 권의 책(누가복음과 사도행전)도 이런 유의 역사와 잘 부합된다. 그 책들은 특별히 읽기에 좋다.
그러나 행전의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와 같은 순전히 역사적인 문제만 석의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누가는 과연 어떤 목적으로 그 자료를 이런 식으로 선별하고 구성해 놓았는가와 같은 신학적인 문제도 포함된다.

누가가 어떤 의도를 가졌는가 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어려운 문제이다. 그 문제가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해석학에 결정적인 관건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누가가 모든 시대의 교회를 위하여 하나의 패턴을 제시하려는 의도를 갖고서 행전을 기록했다면, 그 패턴은 반드시 규범성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의 의도가 그런 것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해석학적인 문제를 다루어야 할 것이다.

누가의 의도나 목적은 해석학을 위해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행전을 읽고 석의를 해 나갈 때에 언제나 이 문제를 염두에 두는 것이 특별히 중요하다.

첫단계.
책 전체를 한 번에 통독해 보는 것이 좋다. 그리고 읽어가면서 관찰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법을 습득하라.
⑴ 한 번 또는 두 번 사도행전을 통독하라.
⑵ 읽으면서 주요 인물과 장소, 계속 반복되는 주제(누가가 참으로 관심 둔 것이 무엇인지?), 그 책의 자연스러운 구분 등에 대해 주목하라.
⑶ 이제 다시 처음부터 대충 읽으면서 앞에서 관찰한 사항들을 간략하게 메모하여 참고하도록 하라. ⑷ 누가가 이 책을 기록한 목적이 무엇인지 스스로 물어보라.

사도행전의 개관.
먼저 행전의 자연스러운 구분들을 살펴보자. 행전은 베드로(1-12장)와 바울(13-28장)로 나누거나 복음의 지리적인 확장(1-7장, 예루살렘;8-10장, 사마리아와 유다;11-28장, 땅끝)으로 구분하는 일이 많다.
그러나 행전을 자세히 살펴보면, 누가 자신이 제시한 또 하나의 해결방법이 있다.
그것이 전체 내용을 더 잘 연결시켜 주는 것 같다.
① (행6: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② (행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③ (행12:24)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④ (행16:4) 여러 성으로 다녀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를 저희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행16:5)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
⑤ (행19:2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이야기가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될 때마다 이런 요약적인 진술들을 하고 있다. 이런 실마리를 근거로 해서 살펴보면, 행전은 6개 부분으로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① 1:1-6:7. 예루살렘의 초대교회에 대한 묘사로, 초기의 복음 전파와 일상적인 삶의 모습, 교회의 확장과 그에 대한 최초의 반대 등을 그리고 있다. 이 부분이 얼마나 유대적인지를 알 수 있다. 이 부분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신자와 아람어를 사용하는 신자들간의 분열이 시작되었음을 보여 주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② 6:8-9:31. 헬라파 사람들(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또는 사마리아 사람들과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복음이 전해짐. 최초의 복음의 지리적인 확장에 대하여 묘사한다. 바울의 회심을 말하는데, 그는 ⑴ 헬라파 사람이었고 ⑵ 유대인 반대자였고 ⑶ 특별히 이방에 대한 복음과 확장을 담당한 사람이었다.
스데반의 순교가 이 최초 복음 확장에 열쇠가 된다.
③ 9:32-12:24. 최초로 이방인에게 복음이 확장된 사실에 대한 묘사. 열쇠는 고넬료의 회심. 고넬료 회심의 의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인정받는 지도자였던 베드로를 통하여 이루어진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였다는 점. 안디옥 교회의 이야기가 포함, 거기서는 이방인의 회심이 이제는 의도적으로 헬라파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④ 12:25-16:5. 바울이 지도적 위치를 담당한다. 복음이 이방인들까지 포용하게 되었으므로 유대인들이 복음을 공공연히 배척하게 된다.
⑤ 16:6-19:20. 복음이 서방의 이방 세계로 확장되는 과정에 대한 묘사. 복음이 유럽으로까지 확장된다.
⑥ 19:21-28:30. 바울과 복음을 로마로 가게 하는 사건들에 대한 묘사로, 특별히 바울의 재판 과정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는데, 그 재판에서 바울은 3번이나 무죄한 것으로 선포된다.

여기에 결정적인 요인이 빠졌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하심이다. 매 주요 전환점마다 매 주요 인물마다 성령께서 절대적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하신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누가에 의하면, 이런 진행은 모두 인간의 계획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서 뜻을 두셨고, 성령께서 그 뜻을 이루셨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누가의 목적.
1. 사도행전을 이해하는 열쇠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복음이 처음 유대교에 근거한 예루살렘 중심의 상황으로부터 이방인을 중심한 전세계적인 확장에로 진행해 나간다는 사실에 대해 누가가 관심을 가졌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2. 누가는 복음의 진행에 관심이 있었다. 왜냐하면 첫째. 그는 사람의 생애, 즉 사도들의 전기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야고보의 최후에 대해서만 기록하였다. 이방으로 복음이 퍼자게 되면 베드로로 전면에서 사라져버린다. 요한을 제외한 나머지 사도들에 대해서는 언급도 없다. 바울도 크게 관심을 가지지만, 이는 다분히 이방 선교에 대한 관심에서 나온 것이다.
둘째. 누가는 교회의 조직이나 형태에 대해서는 거의 전혀 관심이 없다. 행6장의 일곱 사람에 대해서도 집사라고 부르지 않으며, 더욱이 그들이 곧 예루살렘을 떠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지교회들이 어떤 형태로, 누구의 지도를 받아 어떻게 조직되었는지에 대해 그저 '장로들을 택했다'(14:23)는 말만 할 뿐, 그 이상의 언급은 전혀 하지 않는다.
셋째. 예루살렘에서 로마에 이르기까지의 한 방면 외에는 다른 지리적인 확장의 역사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그레데, 본도, 갑바도기아, 비두니아에 대해서 전혀 언급이 없으며, 동쪽으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남쪽으로 애굽으로 교회가 확장된 사실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이 없다. 이는 누가의 사도행전 기록 목적이 단순히 교회 역사 자체를 기록하는 데 있었던 것이 전혀 아님을 말해준다.
3. 누가는 어떤 일들을 규격화시키는 일, 즉 모든 일을 획일화시키는 일에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는 개별적인 회심 사건들을 다룰 때, 보통 두 가지 요소를 첨가시키곤 하였다. 곧 물 세례와 성령의 강림이다. 그러나 이 두 요소의 순서가 때로는 바뀌기도 하고, 방언에 대한 언급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회개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점도 나타나기도 한다.
또 누가는 이방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에서 행했던 것과 유사한 공동체적인 생활을 그대로 따랐는지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고, 암시도 하지 않는다.
이같은 다양성은 어떤 특정한 초대교회의 실례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나 교회 생활에 규범적인 모델이 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참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누가는 그의 첫 독자들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가 하는 것이다.
4. 그럼에도 우리는 사도행전의 많은 부분들이 누가에 의해서 하나의 모델로 제시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모델은 어떤 특정한 사항들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전체적인 면모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이 누가를 통하여 행전을 기록하게 하신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이 활기있게, 승리를 거두면서 앞으로 뻗어 나감으로써 사람이 변화되고 지역 사회가 변화되는 사실이 곧 그 이후 계속 이어지는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바로 이것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기에 그 어떠한 것, 즉 산헤드린이나 회당, 편협한 마음, 감옥도 음모도 막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가 초대교회의 모습을 닮아야 한다는 것이다.

석의의 한 가지 실례.
가장 먼저 할 일은 그 부분을 읽어서 그 직접적인 전후의 문맥을 살피는 것이다. 서신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도행전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은 문맥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 이 설화 또는 설교의 주제는 무엇인가?
- 이 부분은 사도행전의 설화 전체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 누가가 이 부분을 설화에 포함시킨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하는 것들이다.

그러면 먼저 6:1-7을 살펴보자.
이 단락은 전체적인 흐름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 이에 대해 2가지를 말할 수 있다.
첫째. 이 단락은 사도행전의 첫부분(1:1-6:7)을 결론짓는 역할을 한다.
둘째. 이 단락은 둘째 부분(6:8-9:31)으로 옮아가는 하나의 전환의 역할을 한다.

또 이 부분은 공동체 내의 첫 갈등에 대해서도 암시를 주고 있다.
당시 역사적 상황을 살펴보면,
1) 헬라파 유대인들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 즉 디아스포라에서 돌아와서 현재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는 유대인들이다.
2) 그런 헬라파 유대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만년에 시온산에서 죽어 거기에 묻히고 싶어서 예루살렘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토박이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죽게 되면 그 미망인들은 삶을 영위할 수단이 끊어지게 되어 있었다.
3) 이 과부들은 매일매일 구호품을 받아 생활했는데, 그 구호품을 주는 일로 인하여 예루살렘의 경제가 아주 압박을 받게 되었다.
4) 6:9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헬라파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의 헬라어를 사용하는 회당을 갖고 있었고, 그 회당에 스데반과 다소(헬라어를 사용하는 길리기아에 위치함, 9절)에서 온 사울이 소속되어 있었음이 분명히 나타난다.
5) 초대교회가 이 회당 내로 상당히 잠식해 들어가 있었음이 6장에 나타난다. 자기의 과부들이라고 하는 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피택된 7사람의 이름이 모두 헬라어식이라는 사실과 디아스포라 회당에서 강한 반대가 나왔다는 사실.
6) 7사람을 집사라고 부른 적은 없다. 그들은 그저 '일곱 사람'(21:8, 개역에는 '집사'로 되어 있지만, 다른 역에는 '사람'으로 되어있다)이라고만 불리워지며, 헬라어를 사용하는 과부들을 위한 매일매일의 구호사업을 감독하는 직무를 맡는 자들이었고, 동시에 말씀의 사역자들(스데반, 빌립)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6:8-8:1에 보면, 그 일곱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을 예루살렘 밖으로 복음을 확장시키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부각시키고 있다.
누가는 스데반의 순교가 그런 복음의 확장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8:1-4).

그러므로 행6:1-7의 설화는 우리들에게 초대교회가 어떻게 성직자와 평신도 집사들을 조직하게 되었는지를 알리려는 데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오히려 이 구절은 예루살렘을 근거지로 하였던 교회의 첫 확장의 계기가 된 배경을 제시하고 있다.

8:5-25.
여기서 우리는 초대교회의 첫 번 파급으로 알려진 실제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여기서 설화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간파하기 위해서는 설화를 여러분 자신의 말로 기록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음은 우리가 관찰한 것을 요약한 것이다.
8:5-25의 이야기는 차서있게 진행된다.
* 여기서 빌립의 최초 사마리아 사역에 대한 보고와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 들린 자들을 낫게 하는 기사가 부수적으로 실려 있다(8:5-7).
* 사마리아인들이 믿고 세례를 받은 것을 보면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이 많았던 것 같다.
* 예루살렘 교회가 이런 기이한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파송하게 되었고, 그때에 비로소 사마리아인들은 성령을 받게 되었다(8:14-17).

여기서 누가의 관심은 2가지이다.
- 사마리아인들의 회심과 시몬 사건이다.
사마리아의 회심에 대해 두 가지 사실들이 그에게는 의미심장한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 복음의 첫 번째 지역적 확장인 사마리아 선교가 사도들의 계획이나 프로그램과 상관없이 헬라파 중 한 사람에 의해 수행되었다는 점과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의 독자들이 사마리아 선교가 신적 승인과 사도적 승인을 모두 받은 것임을 아는 것이 중요했다.
이것을 위해 누가는 성령 강림을 사도들이 안수할 때까지 보류해 두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런 사실은 비록 그것이 교회 성장에 대한 사도의 회의를 거치지 않고 일어난 것이긴 해도, 헬라인들의 선교 사역은 사도의 승인을 받지 않은 이단적인 운동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누가의 전체 의도와 일치한다.

이런 해석을 하는 이유는 3가지이다.
① 베드로와 요한이 당도하기 전에 사마리아인들에 대하여 설명된 모든 것들이 사도행전 다른 속에서 초신자들의 경험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인들도 실은 기독교인의 생활을 시작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② 사도행전의 다른 곳에서도 여기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임재가 기독교인 생활에 가장 핵심적인 요소였다. 그렇다면, 이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없이 그들이 과연 어떻게 기독교인의 삶을 시작할 수가 있었을까?
③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성령의 임재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1:8, 6:8, 10:38). 그 임재는 종종 어떤 가시적 증거로 명시된다. 그러므로 누가가 성령의 '임함', 또는 성령을 '받음' 등과 같은 의미로 사용한 성령 임재의 이러한 능력적, 가시적 현시가 사마리아에서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이 설화에서 시몬의 역할이 복잡하다. 시몬이 초대교회의 박해자로 널리 알려졌다는 증거는 경외전에서 풍부히 기록되어 있다. 그런 이유로 누가는 시몬과 기독교 공동체간의 미묘한 관계를 설명하여, 그의 독자들에게 시몬은 신적인 또한 사도적 승인도 받지 않은 인물임을 알리기 위하여 이 자료를 포함시켰음 직하다.
누가의 전체 설화는 시몬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다. 베드로의 말은 누가가 시몬의 기독교에 대한 태도에 내린 판단을 반영한다. 그것은 잘못되었다.

우리는 누가의 설화를 석의함에 있어, 그 내용이 무엇이며, 무슨 까닭에 이것을 기록하였는지를 탐구한다는 것이 경건적인 면에 흥미를 가지고 성경을 읽는 분들에게는 불필요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 작업이야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적절히 경청하기 위해 마땅히 내딛어야 할 첫걸음인 것을 알아야 한다.

사도행전 해석.
행전은 초대교회를 묘사해 줄 뿐 아니라, 모든 시대에 걸친 교회에 규범을 제시하는 말씀도 포함하고 있는가? 만일 그러한 말씀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는가?

일반적인 원리들.
여기서 핵심적인 해석학적 문제는 곧 초대교회에 일어난 것을 설명하는 성경의 설화들은 또한 앞으로 올 교회에 반드시 일어날 것을 묘사하는 규범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가라는 문제이다.

사도행전의 여러 예들을 보면서, '우리는 이것을 반드시 하여야 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든지 또는 '우리가 이것을 해도 될까'라고 의견을 타진해야만 할 어떤 규범적인 예들이 과연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주장은 이렇다.
성경이 우리가 어떤 것을 반드시 행해야 한다고 명백하게 서술하지 않는 한 단순히 기술되었거나 묘사된 것은 결코 규범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통상적으로, 성경에서 인출해 낸 교리적 서술은 다음의 세 가지 유형 중 어느 하나에 속한다.
(1)기독교 신학(기독교인들은 무엇을 믿는가?)
(2)기독교 윤리학(기독교인들은 어떻게 행동해야만 하는가?)
(3)기독교 경험 또는 실천신학(기독교인들은 무엇을 하는가?).
이런 유형들은 다시 두 종류의 진술들로 구별된다. 그것은 원초적인 진술과 부차적인 진술이다.
원초적인 진술은 성경의 분명한 명제들 또는 명령들로부터 유추한 교리적 진술들이 있고, 부차적인 진술에는 단지 부수적으로 암시나 선례에 의해 유추한 진술들이 있다.

즉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감되었다는 것이 원초적인 가르침이다. 그러나 영감의 세부적인 특성은 부차적이다. 부차적인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부차적 진술이 지닌 궁극적인 신학적 가치는, 그 진술이 원초적 진술과 얼마나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기독교인들이 선례라는 명목으로 성경에서 유추해 내는 거의 모든 것은 바로 우리가 제시한 세 번째 유형인 기독교 경험 또는 실천신학 분야에 속하는 것이며, 언제나 부차적인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성만찬은 교회 내에서 계속적으로 시행해야 하는 행사이다. 그것은 원초적인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그것을 명하셨고, 바울서신과 행전이 이를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성만찬 준수의 횟수나 그것을 실행한 장소는 다르며, 이것은 전통과 선례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속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단지 그 문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표명하지 않고 있다.
세례의 필요성은 원초적이나 그 양태는 부수적이다.

이런 논의와 밀접히 연관된 것으로서 의도성에 대한 문제가 있다.
단지 성경에 기록되었다고 어떤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해석학의 일반 원칙으로서 제시할 수 있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에 이렇다고 분명히 의도된 곳에서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특히 역사적 설화를 해설하는 데 있어 핵심이 되는 문제이다.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한 전체 의도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누가는 예루살렘에 거점을 둔, 유대주의 본위의 유대인 신자들에게 그 기원을 둔 교회 어떠한 연유로 범세계적 현상인 주로 이방인들의 교회로 부각되었는지, 또한 성령께서 이 보편적인 구원 현상을 어떻게 은혜에만 기초를 두면서 주도하시고 계신지를 보여 주려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것도 성령의 능력을 받은 교회의 이와 같은 전진 운동을 저지할 수 없다}는 반복된 주제를 보면서 우리는 누가가 그의 독자들에게도 이러한 것이 그들 실존의 모델로 간주하기를 의도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누가의 전체적인 의도를 간파하는 데 도움을 줄 목적으로만 제시된 설화 내의 세부적인 사항들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 세부 사항들도 동일한 교훈을 주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가? 이것들도 설화의 모델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이러한 세부 사항들은 설화의 주요 요점에 부수되는 것들이라는 사실과 설화마다 그 세부 사항들이 불명료하다는 사실에 있다.

예를 들면 행6:1-7은 누가의 전체 구조에서 행전의 첫부분의 결론이요, 동시에 헬라인들을 소개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게 된다. 또 이 구절은 기독교 공동체 내의 일고 있던 첫 번째 긴장 관계를 어떻게 평화적으로 해결하였는지도 보여주고 있다.
행6:1-7에서 부수적으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예를 들면, 교회 내의 소수 그룹을 돕기 위한 최선의 방안은 그들로 하여금 직접 선출한 지도자를 갖게 하는 것 등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하는가? 꼭 그럴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누가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누가가 이 설화를 기록할 당시 이런 문제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라고 우리가 믿을 만한 근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이러한 이야기에서 어떤 것들을 얻게 되든지 간에 그것들은 누가가 궁극적으로 의도한 것의 부수적인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말의 핵심은 그 설화에서 우리들에게 주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에서 가르치려고 의도한 것과 우선적으로 관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논의한 것을 토대로 역사적 설화에 대한 해석 원리를 제시한다면 다음과 같다.
1. 행전에서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규범적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행전에 기록된 설화들이 의도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교훈과 우선적으로 관계하고 있다.
2. 설화의 가장 기본적인 목적에 부수적인 것은 영감을 받은 저자의 사건에 대한 이해를 참으로 잘 반영한 것일 수 있지만, 설화가 의도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과 동일한 교훈적인 가치를 지닐 수는 없다. 부수적인 것이 원초적인 것으로 되어서는 안된다.
3. 역사적 선례가 규범적인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반드시 목적과 관계가 있어야만 한다. 만일 주어진 설화의 목적이 선례를 남기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날 수만 있다면, 그 선례는 규범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행6:1-7의 기록 목적이 교회에게 지도자들을 선발하는데 대한 선례로 규범적인 것이라면, 그것을 석의적으로 증명해 볼 때만 후대 기독교인들이 반드시 따라 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특수 원리에 따라 취급되어야 한다.

특수 원리.
1. 오늘날 우리의 행동에 성경적 권위를 부여하기 위하여 성경의 선례에 근거한 유비를 사용한다는 것은 정당하지 않을 것이다.
예)기드온이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을 때 사용한 양털 - 이 행동에 대한 성경적 권위도 없고, 그런 행동을 권장하는 경우도 없다.
2. 설사 이제 제시하려는 것이 저자의 우선적인 목적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성경의 설화들에는 예화와 종종 패턴으로 삼을 만한 것들이 들어있다.
예) 바울은 구약의 어떤 예들을 들어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 무사안일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경고하였다(고전10:1-3).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행한 행위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다윗의 예를 역사적 선례로 사용하였다(막2:23-28).

선례를 들어 현재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경우에서는 그 선례가 특정한 행위에 대한 규범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사실은 사람이 진설병을 늘 먹을 수 있다거나 안식일에 이삭을 딸 수 있다는 교훈을 주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선례는 안식일에 관한 원리를 예증한다.
성경의 선례를 현재의 행위를 정당화시키는데 사용하려면, 그 행위의 원리가 그러한 가르침의 목적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다른 구절들과 부합하여야만 한다.
3. 성경의 선례들은 왕왕, 비록 그것들이 규범적인 것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계속하여 반복될 수 있는 패턴들로 간주되는 수가 있다.
특히 실행 자체는 반드시 행해야 할 규범적인 것이지만, 그 양태는 그렇지 않을 경우가 있다.
어떤 실행이나 패턴들이 과연 반복되는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짓기 위한 지침으로서 다음의 사실들을 고찰해 보면 좋다.
첫째. 단 하나의 패턴이 발견되고, 그 패턴이 신약성경 자체 내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가장 가능성이 짙은 경우라 할 수 있다.
둘째. 여러 패턴들이 불명료하게 등장하거나 어떤 패턴이 나타나기는 하나 한 번만 나타날 때, 그 패턴은, 만일 그것이 하나님의 인정한 것이라는 증거가 있든가, 다른 성경의 가르침과 부합할 경우라면, 후기 기독교인들에게 반복적일 수 있다.
셋째. 문화적인 독특성을 지닌 것은 전혀 반복될 수 없든지, 아니면 새로운 또는 상이한 문화로 다시 표현되어야만 한다.